시가 필요한 시대, 시집을 편다
시가 필요한 시대, 시집을 편다
  • 조홍기 기자
  • 승인 2015.01.08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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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진 대표 등 세명이 꾸려나가는 도서출판 심지

▲ 윤영진 대표
소설보다 먼저 시가 있었다. 시는 인간의 생존,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기도 했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혹은 투쟁의 목소리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함순례 시인은, 이 세상을 시가 필요한 세상이라고 이야기하며, 시의 이중적 측면을 설명했다.

“시가 필요 없는 사회는 따뜻한 사회고 시가 필요한 사회는 혹독한 사회예요. 자본주의 산업화 체계를 바꿀 세 가지가 시, 도서관, 자전거라는 말이 있잖아요. 시가 필요 없는 시대가 가장 좋은 시대예요. 시인이 시를 쓰지 않아도 갈급함이 없는 시대죠.”

함순례 시인은 시가 읽히는 사회를 꿈꾼다. 자신이 편집부장으로 있는 도서출판 심지에서 기획 시선집인 애지시선을 출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변화의 바람 이후 등장한 ‘심지’
대전 동구 삼성동, 인쇄 거리 한 골목, 도서출판 심지는 눈에 띄는 간판 하나 없는 건물 4층에 있다. 윤영진 대표, 함순례 편집부장, 한천규 차장 세 명이 꾸려나가는 도서출판 심지는 문학잡지, 단행본 등 종합 출판을 하며, 기획 시선집인 애지시선을 펴내고 있다.

도서출판 심지는 2004년에 문을 열었다. 10년 동안 다른 출판사에서 일하던 윤영진 대표가 직접 출판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때는 출판문화가 바뀌기 시작한 이후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출판문화는 빠르게 바뀌었다. 그 이전에는 원고를 원고지 형태로 받아 워드로 작업해야 해서 오퍼레이터가 많이 필요했다. 표지도 수작업으로 만들어 개인 역량에 따라 많은 것이 좌우됐다. 그러다 디스켓으로 원고가 오가기 시작했고 이제는 메일로 원고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출판사에 필요한 인력이 반쯤은 줄었다. 그 변화에 따라 자의 반, 타의 반 출판업계를 떠나는 사람도 생겼다.

윤영진 대표는 출판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 이후, 도서출판 심지를 만들었다. ‘심지’는 초심, 굳은 마음으로 출판사를 이어나가겠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윤영진 대표는 도서출판 심지를 만들고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많은 것에 신경 썼다. 당시에는 지방 출판사에서 저자들이 직접 교정‧교열을 보고 전문가가 따로 교정‧교열을 보는 경우가 적었는데, 도서출판 심지는 전문 교정‧교열을 보는 것은 물론 디자인, 인쇄도 세심하게 신경 쓰며 그동안 해 오던 일반적인 방식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책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폰트, 자간 등에 신경을 많이 썼다.

윤영진 대표는 도서출판 심지가 처음 했던 일을 기억한다. 대전작가회의 문예지 <작가마당>을 편집하는 일이었다. 한 번 편집한 책은 백 권도 되고 천 권도 될 수 있었다. 도서출판 심지가 신경 써서 만든 책들은 스스로를 홍보하는 수단이 되어 지금까지 도서출판 심지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시가 필요한 세상, 꾸준히 시집을 내는 일
도서출판 심지가 애지시선을 발행한 지는 10년 정도 됐고 현재 58권까지 발행했다. 함순례 시인이 기획, 섭외, 해설, 홍보 등 애지시선을 꾸려 나가는 데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애지시선은 삶의 희노애락이 진득한 시편을 소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시인의 시집도 출판한다. 대전을 중심으로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의 시집을 낸다. 한 분기에 두 권씩, 한 해에 여덟 권 시집을 내고 있지만, 애지시선의 방향에 맞는 시집이 없으면 건너뛰기도 한다. 좋은 시집이 없다면 굳이 발행하지 않으며 애지시선만의 색을 유지하고 있다.

시집은, 출판 인프라가 잘 갖춰진 서울에서도 자비로 출판하는 경우가 많다. 상황이 열악한 지방의 경우에는 기획 시선집 출판이 쉽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도 애지시선을 주목한다. 애지시선으로 시집을 내고 싶어 하는 시인도 늘었다.

애지시선을 통해 등단하는 시인도 있다. 대형 출판사의 눈에 띄지 않아 시집을 출판하지 못하는 시인, 곳곳에 숨어 있는 시인을 발굴하는 것도 애지시선의 역할 중 하나다. 함순례 시인은 많은 사람이 옆구리에 시집을 끼고 다니고, 시집을 즐겨 선물했던 시절을 추억한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시집이 읽히지 않는 사회가 되었어요. 시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만 시집을 읽죠. 우리만의 리그가 되어 버렸어요. 많은 사람이 시집을 읽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에서, 양장본은 주로 1만 원대인데 애지시선은 9천 원으로 가격을 정했어요.”

윤영진 대표 역시, 많은 사람에게 시를 전하려 한다. 요즘에는 다양한 매체에서 시를 감상할 수 있지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시집’이라는 책의 형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0년 가까이 시를 편집하니까 이제 일상생활에서 짧은 메시지를 보낼 때 시를 인용하기도 해요. 시를 읽지 않는 친구들에게도 좋은 시를 뽑아 주면 좋아해요. 어떤 형식으로든 다양하게 시를 읽었으면 좋겠어요. 종이책만이 지닌 매력도 있죠. 손으로 종이의 질감을 만지며 느끼는 감정은 모니터로 보고 느끼는 것과는 달라요.”

지역 출판사의 역할을 생각하다
우리 시대 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시를 읽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애지시선을 지금껏 이어오게 했지만, 지역 출판계의 상황이 시집 출판에 적합한 면도 있다. 윤영진 대표는 지방에서 시집보다 소설집을 내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우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소설가가 적고, 소설책이란 것이 저명한 소설가를 중심으로 출판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자본력이다. 하지만 출판사가 애초에 큰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니며 시집 시장 또한 워낙에 좁아 도서출판 심지는 애지시선 출판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함순례 시인의 동료, 선후배들은 애지시선을 어떻게 계속 내느냐며 걱정 어린 말을 건네 오기도 한다. 도서출판 심지에서는 애지시선을 계속 내는 데 필요한 돈을 다른 작업으로 충당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진행하는 문학나눔 사업의 일환으로 분기마다 문학 우수 도서를 구입해 보급하는 것이 힘이 되기도 했다. 현재까지 낸 58권의 애지시선 시집 중 과반수가 우수 도서로 선정됐다. 윤영진 대표는 문학나눔 사업이 없었다면, 애지시선은 명맥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제작비가 없어 애지시선을 만들지 못할 상황에 처했을 때면 애지시선 시집이 우수 도서로 선정돼 지원을 받았으니, 도서출판 심지에서 애지시선을 계속 내는 것을 ‘운명’처럼 여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함순례 시인은 녹록지 않은 상황 속에서 하나의 문화 운동 차원으로 애지시선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자본력이 있으면 굉장히 좋은 책을 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좋은 책 내는 게 하나의 지역문화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지역 사회에서 출판사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계속 해 나가고 싶어요.”

윤영진 대표는 애지시선으로 시집을 낸 시인이 평단에서 좋은 평을 받거나 상을 받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적은 숫자일지는 모르지만 애지시선을 찾는 독자들이 있기에 도서출판 심지는 앞으로도 계속 제자리를 지킬 것이다.

“하루에 한두 번은 꼭 책 주문이 와요. 책을 사 읽는 사람이 있구나 생각이 들고 굉장히 고맙죠. 앞으로도 초심으로 차분히 진행할 거예요. 애지시선 꾸준히 낼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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