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의 덕(德)은 과연 허구일까??
노자(老子)의 덕(德)은 과연 허구일까??
  • 허정 이상엽
  • 승인 2018.03.04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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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德)은 인격이다. 사람은 덕(德)이 있어야 한다.” 덕(德)은 그 사람의 인품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인식되어 왔다. 오랜 세월 세간에 회자된 탓에 진리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어쨌든 덕(德)이란 인간이 갖추어야할 기본임은 틀림없다.

허정 이상엽

그러나 덕(德)에 대한 이해는 제각각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매우 혼란스러워한다. “어떤 사람은 베푸는 것,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악행(惡行)을 덮어주는 것, 어떤 사람은 남 몰래 베푸는 선행을 덕(德)이다.”라고 하는 등의 주장이 그것이다. 이래도 진리, 저래도 진리라고 하는 주장인 동시에 이것도 덕(德), 저것도 덕(德)이라고 하는 주장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불의(不義)를 덮어주고, 악행(惡行)을 눈감아 주고, 오류를 알면서 바로잡지 않고,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고, 거짓을 진리로 호도하는 등의 행위를 덮어 주는 것은 덕(德)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덕(德)과 악덕(惡德)도 구분하지 못하고 혹세무민(惑世誣民) 행위로 밖에 볼 수 없다. 예로부터 덕(德)과 악덕(惡德)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옛 성현은 물론 우리 조상들은 5덕(五德) 또는 10덕(十德) 그리고 흉덕(凶德), 악덕(惡德) 등으로 덕(德)에 대하여 명확히 구분했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이 구분해 놓은 덕(德)을 기준으로 보면 “악행(惡行)도 덮어주는 것, 선악(善惡)을 구분하지 않고 베푸는 것, 불의(不義)를 보고 못 본 체하는 것,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보고 덮어 주는 것” 등은 덕(德)을 베푸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이는 오히려 악행에 동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無)는 상덕(上德) 유(有)는 하덕(下德)

 

그러니까 유교(儒敎)는 “온화·양순·공손·검소·겸양을 5덕[德]으로 정의했고, “악덕 악성(惡德惡性)을 흉덕(凶德)”으로 정의했다.

 

병가(兵家)는 “지혜[智], 믿음[信], 어질음[仁], 용기[勇], 엄함[嚴]”을 5덕[德]으로 정의했으며, 불가[佛敎]에서는 “포마(怖魔), 걸사(乞士), 정계(淨戒), 정명(淨命), 파악(破惡)”을 5덕[德]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노자(老子)는 “상덕(上德)은 위(爲)가 없고 무(無)로써 하며, 하덕(下德)은 그를 하[爲]고 유(有)로써 한다(上德, 無爲而無以爲, 下德, 爲之而有以爲).”라고 했으며, 장자(莊子)는 “천지(天地)에 통하는 것은 덕(德)이며, 만물에 행(行)하는 것은 도(道)이다(莊子…通於天地者, 德也, 行於萬物者, 道也).”라는 등으로 덕(德)을 정의했다.

 

 

베푸[布施]는 것이 덕(德)이다?

 

따라서 선행과 악행, 무위와 유위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진실과 거짓을 가리지 않고 덮어주고 감싸주며 베푸는 것’ 등을 덕(德)에 포함시키는 것은 노자(老子)의 말씀을 허구로 치부하고 부정하는 주장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막말일 뿐이다.

 

“덕(德)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子曰, 德不孤, 必有隣).” 공자(孔子)님의 이 말씀에 대하여, 주자(朱子)께서는 “덕불고(德不孤)는 이치[理]를 말한 것이며, 필유인(必有隣)은 사(事)를 말한 것이다(朱子曰德不孤以理言必有隣以事言).”라고 해석했다. 덕(德)의 체(體)와 용(用)을 말한 것이라는 얘기다.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게 인도해주는 덕(德) 있는 사람에게 어찌 이웃이 없겠는가?

 

노자(老子)께서는 “천하의 만물은 유(有)에서 생하고 유(有)는 무(無)에서 생했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라고 했으며, 장자(莊子)께서는 “천지가 비록 크지만 그 조화는 고르며 만물이 비록 많지만 그 다스림은 하나이다(莊子曰, 天地雖大, 其化均也, 萬物雖多, 其治一也).”라고 했다.

 

이런 저런 옛 성현의 말씀과 현실을 고려하면 천지자연의 질서를 따르고 천륜과 인륜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덕(德)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와 어긋나는 것은 악덕(惡德)이 된다. 세상은 잠깐도 쉬지 않고 변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불역(不易) 속에서 이루어진다. 악을 덮어 주는 건 자연의 순환법칙을 부정하는 것으로 덕(德)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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