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예술인 연극인 이종국
대전 예술인 연극인 이종국
  • 성수진기자,사진 성기영
  • 승인 2013.03.10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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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 여러 생으로 사는 삶

동춘 서커스단이 대전에 내려오면, 초등학생 이종국의 가슴이 뛰었다. 돈이 없어 몰래 숨어 들어간 장막 속엔 다른 세상이 있었다. 서커스와 노래보다는 만담에 마음이 끌렸다. 만담을 보며 막연한 동경을 키우던 소년은 연극배우가 되었다.

운명처럼 찾아온 내 자리, 무대
이종국 배우 스스로 기억하는 어린 시절, 그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지금도 감정이 북받치면 가끔 말을 더듬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심해진 말더듬이 때문이다. 말더듬이 때문에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도 멀리했다. 학용품 사러 문방구에 갈 때도 친구들이 다 빠져나간 뒤에 들어갈 정도였다.

▲ 대전 예술인 연극인 이종국
“그래도 연극 관련해서 뭔가 한 번 해보겠다는 잠재의식이 있었나 봐요. 대전상업고등학교 2학년 때, 연극부 오디션이 있다는 선배 말을 듣고 오디션을 보러 갔어요. 출연 배우 다섯 명이 필요했는데, 오디션에 다섯 명이 왔어요. 떨어질 수가 없었지요. 언어 교정도 확실히 돼 있지 않았는데 연극부에 들어갔으니, 운명적이었죠.”

대전상고에서 공부를 곧잘 했던 아들이 졸업 후에 금융계에 취직했으면 했던 어머니는, 그 바람을 조용히 접었다. 오래 고민하고, 결심한 것은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아들의 진중한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1966년 당시, 각 학교 연극부들이 최문휘 선생의 에리자베스 극단에 모여 연습했다. 적게나마 지도비 같은 것을 냈다. 다른 친구들은 집에서 지원해 줬지만, 그는 자신의 힘으로 지도비를 마련해야 했다. 다른 이를 대신해 청소하고,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며 연극부에서 활동했다. 괜찮은 배우가 될 거라는 말도 들었다.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배우와 잘 맞기도 했지만, 최문휘 선생은 유난히 착실한 그의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탄갱부>로 1966년 밀양 청소년연극경연대회에 선 것이 이종국 배우의 첫 무대다. 모두가 긴장한 탓에, 대사를 잊기도 하고, 50분짜리 작품을 40분에 끝냈다. 성공적인 무대는 아니었지만, 무대에 서며 연극배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확고해져 갔다.

무관의 제왕이 되기로 결심하다
“무대에 오르면 연극배우가 무관의 제왕이라는 걸 느껴요. 뭐든지 혼자 알아서 해야 하거든요. 일단 무대에 서면 아무도 도와줄 수가 없어요. 어떤 실수를 해도 혼자 해결해야 해요. 자기 아니면 해결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무관의 제왕, 연극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공부가 필요하단 것을 느꼈다. 고등학교 연극부 활동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심 끝에,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겠다는 뜻을 집에 내비쳤다. 연극 무대에 서며 얻은 자신감으로 서서히 말더듬이도 교정되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동안 집에서 나와 에리자베스 극단에서 일했고, 1969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과에 입학했다. 형편은 좋지 않았지만, 형이 등록금만은 내주겠다고 했다. 그 이후 학비는 스스로 충당해야 했다.

“학교 극장에 공연 보러 갔었어요. 옛날 극장이라 낙후돼 있었죠. 초가집이 나오는 옛날 작품인데, 무대 뒤에 조명이 있었어요. 뽀대라고. 그게 열을 받아서 불이 났어요. 극단 일 해본 경험으로, 무대에 올라가서 발로 불을 껐죠. 공연 끝나고 누가 나를 찾았어요.”

당시 극장을 관리하는 선배였다. 자신이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는데 도와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선배가 학생회장이 되고, 이종국 배우를 학생처에 데리고 갔다. 극장을 맡아야 하는데, 공부에 지장이 있으니 장학생을 시켜줘야 한다는 학생회장의 말에, 얼마 후 학교에 장학생을 공고하는 방이 붙었다. 그렇게 이종국 배우는 서라벌예대 첫 번째 실기 장학생이 되었다.

장학생이 되고 학비 걱정은 없었지만, 이것과는 다른 고민이 생겼다. 대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상상했던 것과 달라서 오는 회의감이었다. 어렵게 결심해 들어온 학교를 그만두려고까지 했지만, 그런 마음을 다잡게 해준 것은 배우가 되고 싶은 확고한 꿈이었다.

“내가 지금 예순여섯이고, 권성덕 선생이 일흔셋이라고. 선배라고 불러야 할 나이인데도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당시 선생님 연기를 보고, 배우는 저거야 싶었어요. 배우를 끝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과정이 잘 풀리면서 학교도 계속 다니게 됐죠.”

대전, 사회라는 마당에 나와
서라벌예대가 졸업 작품을 올리면 서울의 기성극단들이 긴장했다. 6개월씩 지독하게 연습해, 새로운 방법으로 만드는 무대에 온 시선이 집중됐다. 졸업생을 중심으로, 오디션을 봐 진행하는 졸업 작품 무대에 이종국 배우는 세 번을 섰다. 졸업 작품에 세 번 참여하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코피를 쏟을 만큼, 하루에 두 시간밖에 못 잘 만큼 열심이었다.

72년에 졸업하고, 입대했다. 3사관학교 조교로 있다 제대한 것이 76년. 프로 연극배우로 발을 내디딘 때다. 서울에서 함께 일하고 싶다는 제의가 있었지만, 그가 나고 자란 곳 대전에서 연극배우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집안 문제도 있었고, 지역의 어려운 연극판에 힘을 싣고 싶었다. 진규태 씨가 운영하는 극단 돌담의 객원 배우로 호흡을 맞추어 작업했다. 연출, 제작은 진규태 씨가, 배우 쪽은 이종국 배우가 맡아 4~5년 함께했다.

“<토끼와 포수>가 당시 처음 올린 작품이었어요. 우리 공연 바로 다음, 서울에서 내가 한 역을 맡은 게 최불암 씨예요. 우리끼리 얘기지만, 우리가 더 잘했다는 말이 오갈 정도로 좋았어요.”

그때만 해도, 연극 마니아들이 있었다. 홍보 수단은 유일하게 포스터였고, 포스터도 백 장이면 충분했다. 포스터 인쇄비와 극장 대관료 정도는 표를 팔아 낼 수 있는 정도였지만, 돈이란 것은 항상 부족했다.

“79년에 대전 MBC에 성우로 들어갔어요. 당시에는 빵 문제 해결하려는 게 컸죠. CM을 주로 했으니 연극판에 스폰서 유치가 쉽지 않을까…. 광고주와 접촉하기 쉽겠다고 생각했어요.”

연극판에 도움이 될까 싶어 시작한 성우였지만, 프로그램을 맡으며 보람도 느꼈다. ‘양반도 한 마디’라는 프로그램을 나중에는 ‘한밭의 메아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7년간 이끌었다.

성우들이 모인 문화 극회에서도 활동했다. 성우들이 모여 카톨릭 문화회관에서 연극을 올렸다. 여전히 만족감은 없던 시절이었다. 다른 성우들이 제각기 가야 할 길 속에서 통과의례처럼 치르던 연극이 이종국 배우에게는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모험, 앙상블에 돛을 달다
“84년, 2월 18일이었어요. 지금 대흥동 상상아트홀 앞에 소극장 앙상블, 극단 앙상블을 만들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연극을 통해서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를 목적으로 소극장과 극단을 만들었어요. 연극 하면서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 컸어요.”

처음 2년 동안은 대전 시내에서 연극 하는 사람은 모두 거쳐 갔을 것이라고 회상하는 그때. 순풍에 돛을 단 듯 앙상블 극단은 활동을 시작했다. 85년, 창단 후 바로 충남연극제에 <낙랑인 가라전>으로 대상을 받았고, 그 이후로도 수상은 끊이지 않았다. 손만 뻗으면 바로 연극인으로 원하던 모습이 닿을 것 같았다.

여건 때문에 연출도 많이 했다. 84년부터 90년까지는 주로 연출을 했다. 연출상도 많이 받았다. 기분은 좋았지만, 연출은 이종국 배우에게 외도에 불과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것. 배우로서의 삶을 인정받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다. 1990년 <한방사람들>로 전국 연극제에서 연기상을 받았을 때 기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1992년에는 <막차 탄 동기동창>으로, 2004년에는 <인류최초의 키스>로 전국연극제에서 연기상을 받았다.

극단 앙상블이 여러 소리를 내며 삐걱댄 것은 단원들이 추구하는 이상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단원들이 자신의 극단을 만들어 나갔고, 극단 앙상블과 소극장 앙상블은 90년에 문을 닫았다. 문을 닫으면서도 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91년에 한남대학교 정문 앞에 소극장 까치골을 만들었고, 극단 동인과 함께 극단 동인 앙상블을 만들었다. 큰 포부를 가지고 시작했지만, 93년, 극단이 갈라지고 극장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동인은 동인대로, 앙상블은 앙상블대로 제 갈 길을 갔다. 여러 차례 그 모습은 변했지만, 극단 앙상블은 꾸준히 활동하고 여러 연극제에서 인정을 받았다. 지금 극단 앙상블은 갈마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작년, 소극장 지원 사업 지원을 받아 궁동에 펀펀아트홀을 만들었다. 이종국 배우가 세 번째로 운영하는 소극장이다.

연극배우, 여러 생을 사는 삶
“배우로 산다는 것은 여러 캐릭터로 산다는 거예요. 나와 정반대인 인물을 육화시키면, 보이지 않았던 내 잠재의식이 보여요. 내 모습이 바로 이건가 싶어 놀라기도 하고요. 이 작업이란 부분이 대단해요. 인물을 창출하고 끄집어내고 만들어야 하거든요.”

이종국 배우는 작품 활동 하는 동안 자신이 맡은 인물, 철저히 그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작품이 끝나면 비워내야 한다. 그래야 다시 다른 인물로 살 수 있다. 작품과 작품 사이 텀을 두기도 해야 하지만, 이종국 배우에게는, 한 번 빠졌던 인물을 털어내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몰입과 해방에 능수능란해야 하는 것도 배우의 일이었다.

배우는 나이가 들며 그 나이대에 맞게 잘 연기할 수 있는 역이 생긴다. 서른 넘어서부터 노역을 맡았지만, 흉내에 불과했다고 회상한다. 세월이 만들어낸 인물의 맛은, 어느 정도 그 세월을 보낸 이만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꽃마차는 달려간다>에서 맡은 역 ‘순보’는 이종국 배우 자신을 돌아보게 한 인물이다. 젊은 시절 방랑하고, 아내를 구박하던 ‘순보’. 자식이 잘못 될까 봐 끌어안고 놓아주지를 않는 ‘순보’. 임종에 가서는 모든 것을 놓아 주는 모습,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한 것이 마음속에 남았다.

“제가 연극 한다고 해서 우리 어머니는 아마 피눈물을 흘리셨을 거예요.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제가 안고 가야 하는 부분이에요. 또 아내한테도 미안한 게 많고요. 대전 MBC에서 성우 하면서도 집에 갖다 준 돈은 얼마 안 됐어요. 다 연극판에 쏟아 부었지….

나는 연극 하면서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녔는데, 식구는 제대로 여행도 못했어요. 주말에 제가 공연하고 그러니까…. 이제 식구가 퇴직을 했는데, 어떻게라도 시간 내서 함께 여행 가려고요. <꽃마차는 달려간다>에서 보면 인생은 회한의 연속이에요. 그런데 저는, 연극 한 것은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무대에 서는 것
오래 열심히 활동하니 자연스레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2007년 대전문화예술의전당 명작 시리즈로 진행한 <맥베스>는 오디션으로 배우를 뽑았는데, 맡을 역이 없다는 생각에 오디션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원영오 연출이 삼고초려처럼 찾아왔다.

“나이 든 배우가 연극의 꼭짓점이라는 거였어요. 싫은 얘기는 아니잖아요. 괜찮은 공연이었어요. 배우가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해보는 것은 영광이에요. 제작 여건도 좋았고. 텍스트만 가지고 재해석한 것이라 뜻깊었죠.”
1999년에 대전광역시 문화상(예술분야)을 받았고, 2004년에는 자랑스런 대전인상을 받았다. 대전 연극계, 예술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대전에 머물며, 대전 연극판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컸지만, 대전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그다.
“제가 수혈받은 부분은 환원하려고 해요. 후진 양성이 중요하단 걸 느껴요. 위기의식 느끼고 노력해야 해요. 또, 마침 서구 신협에서 관심을 보여서 함께 구민들 모집해,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공연까지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려고 해요,”
지역, 그리고 ‘식구’라고 말하는 아내.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이 둘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마음은, 연극배우로서의 것으로 남겨 놓는다.
“평생 연극배우 하는 게 내 궁극적인 꿈이에요. 배우는 은퇴라는 게 없어요. 말을 못하게 되면 방법이 없지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어요. 무대에서 죽을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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