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뉴스 최형순 기자] 올해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은 10월 23일이었습니다. 농부들의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 첫 서리가 내립니다.
새벽마다 풀잎 끝에 서리가 맺히고, 이내 아침 세상은 하얀빛으로 단단해집니다. 서리는 겨울의 예고편이자, 계절의 숨결이 멈추기 전 마지막 숨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그 맑고 찬 기운 속에서 우리는 문득 삶의 본모습을 봅니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화려했던 단풍이 떨어진 자리에는 오로지 본질만이 남습니다.
"올해도 벌써 저물어가고 있구나. 금년 한 해, 또 나는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이루지 못하였나..."
추사비(秋士悲)... 가을에 남자들은 시름이 깊어집니다. 연 초 꿈꾸고 바라던 것들이 허무하게 스러지고, 희고 차가운 서리가 되어 풀잎에 맺히면 문득 이룬 것 없는 허탈한 시름에 한숨만 깊어집니다. 서리는 그 본질 위에 고요히 내려앉습니다.
밤에는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고, 첫 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은 올해 11월 22일입니다. 본격적인 겨울 기분이 드는 시기입니다.
눈은 서리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서릿발 같은 서리와 달리 눈은 포근한 위안이 느껴지는 차가움입니다.
추상(秋霜)같은 엄함이 가을에 맺힌다면, 따스함이 느껴지는 눈이 겨울의 초입에 내리는 것이 묘한 계절의 아이러니요, 인생의 묘미 같기도 합니다.
서리가 땅의 숨을 멈추게 했다면, 눈은 그 위를 덮어 세상을 잠시 쉬게 합니다. 더럽고 추악한 우리의 위선을 덮어 가리기라도 하듯, 내 편을 들어주는 눈은 차가우면서도 따뜻합니다.
어딘가에서 사랑스런 사람을 만나 따스한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이 첫 눈이 기다려지는 이유입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자연은 눈을 내려 모든 흔적을 덮으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 계절엔 조금은 멈추어 서서, 지난 시간의 얼룩을 덮고 새 희망을 준비해야 합니다.
어쩌면, 서리는 경고이고, 눈은 위로인지 모릅니다. 서리는 반성이고, 눈은 격려인지 모릅니다.
서리는 “멈추라”고 말하고, 눈은 “괜찮다”고 속삭입니다. 이 두 자연의 언어는 인간의 인생에도 그대로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일의 속도에만 매달려 마음이 바짝 메말랐던 한 해, 서리는 냉정한 성찰을, 눈은 따뜻한 용서를 건넵니다.
세종의 들녘에는 서리가 내리고, 시 청사 옥상과 이응다리 위에는 첫 눈이 내릴 것입니다. 서리 내린 아침 출근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새 희망을 맞이해야 할 때입니다.
“서리(霜)는 마음을 단단하게, 눈(雪)은 눈을 부드럽게 만든다.” 이 계절, 두 가지를 함께 품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겨울도 우리를 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