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여
궁남지
부여읍 남쪽에 위치한 백제시대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이 연못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무왕조(武王條)에 “3월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고 되어 있다. 사실,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이미
한성시대(漢城時代)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한성시대에 조영된 왕궁에 딸린 연못은 아직 발굴된 바 없어서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웅진(熊津)시대의 왕궁이었던 공산성(公山城) 안에서는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연못이 왕궁지(王宮址)로 추정되는 건물지(建物址)와 함께
발굴되었다.공산성에서 발굴된 이 연못은 바닥이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원형의 연못인데 직경 7.3m, 바닥 직경 4.8m,
그리고 깊이 3m의 크기를 보이고 있다. 이를 토대로 보면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성시대와 웅진시대의 연못은 그자체만 확인될 뿐 여기에서와 같은 삼신산(三神山)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궁남지와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의자왕(義慈王) 15년조에 보이는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는 기록이다. 망해루(望海樓)나 망해정(望海亭)에서 대지(宮南池)를 바라보면 바다와 같이 시원한
느낌을 받았을 터이고, 이렇게 바다와 같이 큰 연못을 왕궁 근처에 만드는 것이 백제가 처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라의 경우 문무왕대(文武王代)에 안압지(雁鴨池)를
만들고, 그 안에 삼신도(三神島)를 조성하며, 주변에 임해전(臨海殿)을 세우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백제의 궁남지와 같은
개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백제의 조원(造苑) 기술은 삼국 중 으뜸이었으며, 통일신라의 조원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궁남지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