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세우고 남과 나누는 일
나를 세우고 남과 나누는 일
  • 글 성수진 사진 정종대
  • 승인 2014.04.1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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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가 만난 사람_김조년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하루를 이루는 24시간 중 온전한 ‘나’로 보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나’는 누구이고 온전한 ‘나’는 무엇일까. ‘나’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를 들여다 본 적이 있는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애써 구하지 않더라도 하루 24시간은 그대로 흐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삶은 그렇지 않은 삶과는 확연히 다른 삶일 것이다.
김조년 교수는 오랜 시간 자신에 관해 고민했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어 왔다. 한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서 정년퇴직해, 대흥동에 서재를 두고 다양한 사람과 여러 방법으로 소통한다. 김조년 교수는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자기 정체성, 자기 철학을 정립하고 다른 이와 나누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함께 글을 읽고 생각 나누기, 편지 쓰기 등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김조년 교수를 옹달샘터에서 만났다. 옹달샘터는 그가 자신의 서재에 붙인 이름이다. 옹달샘은 맑음의 상징이다. 큰 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 하더라도 작은 갈증을 없애주는 옹달샘. 스스로 자연스럽게 생겨난 옹달샘. 옹달샘터에서, 김조년 교수에게 생각하며 세상살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년퇴직하시고 대흥동에 서재를 두고 여러 사람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시나요?

이곳에서 책을 통해, 공부를 통해 사람들 만나고 있어요. 그동안 제가 해오던 일이니까요. 누군가는 정년퇴직하고 새로운 일을 한다는데 저는 새로운 일을 준비하지도 못했고 그것의 의미도 찾지 못했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장소만 바꿔서 하고 있어요. 옹달샘터에서 정기적으로 고전 공부 모임 ‘시루’를 열고 있고요. 옹달샘터 낭독회를 열고 있어요. ‘시루’에서는 한 책을 돌아가면서 낭독하며 공부해요. ‘시루’는 고정 멤버가 있고 같은 텍스트를 여러 달 동안 읽어요. 옹달샘터 낭독회는 고정 멤버가 없어요. 요즘 사람들이 책을 잘 안 읽잖아요. 책을 읽지 않고도 책 내용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낭독회를 만들었어요. 낭독자가 한 시간 동안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선정해 낭독하면 또 한 시간 동안 각자가 받은 느낌을 자유롭게 이야기합니다.

-고전 공부 모임이나 낭독회는 어떤 이유로 시작하셨는지요. 이것들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 싶습니다.

우선 낭독은 낭독만의 매력이 있어요.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는 것이 중요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성찰해 본다는 게 중요하고요. 본인이 먼저 책을 읽어오지 않아도 그 시간에 내용을 소화할 수 있고요. 그리고 인문 고전을 공부하다보면 심성이 달라집니다. 피폐된 마음도 치유할 수 있다고 봐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도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책을 읽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함께 책을 읽어 나가고 새롭게 성찰하면 날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수님이 해 오신 활동을 보면 누군가와의 소통을 중히 여기는 것 같습니다. 평소 삶의 자세라든지, 가치관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못 사는 존재니까 어떤 형태가 됐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합니다. 바둑으로, 장기로, 음식으로, 스포츠로, 모든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만남의 도구가 있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만남의 도구가 글이에요. 글을 통해 만나서 이야기 나눕니다. 그걸 통해서 제 자신이 항상 꿈틀거리는 걸 느끼고 살아있다는 걸 확인해요.

-제자나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 잡지인 <표주박 통신>이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 <청춘에게 안부를 묻다> 등을 보면 교수님께서 편지의 가능성, 기능을 믿고 실천하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편지와 관련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손으로 쓴 편지는 물론 이메일도 잘 보내지 않고 카톡으로 짧은 메시지를 보내는 데 익숙하죠. 편지는 자기 내면의 깊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신변잡기를 간단하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무언가를 얘기하면서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열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편지를 통해 나를 여는 거죠. 편지는 받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아요. 전화는 상대방을 방해하죠. 밥 먹을 때라든지 글 쓸 때라든지…. 하지만 편지는 읽을 수 있을 때에 읽을 수 있잖아요.

가능하면 매일 한 통씩 편지를 쓰고 싶은데 작심을 해도 안 될 때가 많아요. 이메일은 쓰지만, 손으로 쓰는 편지는 전보다 자주 쓰지 못합니다. 요즘에는 제 친구 중 몸이 불편한 이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아직 답은 안 오는데 아마 몸이 불편해서 그렇기도 하고 안 받아보던 편지를 받으니까 쑥스럽기도 해서 그럴 거예요.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아주 깊어져요. 그 사람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지죠. 그런 마음으로 내 자신이 순화되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편지라면 받는 사람도 기분 좋지 않을까요?

편지가 늘 좋기만 한 게 아니라 가끔 오해가 생기기도 해요. 생각을 짧게 글로 표현하는 거니까 설명이 충분하지도 않고요.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같은 말을 똑같이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요. 받는 사람 상태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수도 있으니 오해가 생길 수 있죠.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편지의 가장 좋은 점은 자기 자신을 정화하는 거예요,

-<표주박 통신>이나, <청춘에게 안부를 묻다>는 특정한 인물에게 향했던 편지를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왜 편지를 썼고 어떤 생각으로 많은 이에게 공개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편지는 사사로운 관계에 보내는 건데 그래도 좀 공공화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만든 것이 <표주박 통신>이에요. 선생과 제자 사이 끊임없이 소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졸업생들한테 보낸 편지를 <표주박 통신>에 실었죠. 대학생 때는 내가 가르쳤지만 그분들(제자들)이 사회에 나간 이상 그 분야는 저를 가르쳐야 할 대목이죠. 편지가 오고 가면서 소통을 통한 교육의 상호작용이 생겨요. 그분들이 쓴 편지를 읽다 보면 참 놀라운 내용이 많아요. 깨끗한 맑은 샘물 같은 것이 편지로 전달되죠. 다른 사람들은 <표주박 통신>에서 편지를 보고 ‘이 친구가 이렇게 지내네.’ 하고 안부를 알게 돼요. 그것이 하나의 네트워킹 형태가 되고 공동의 생각 흐름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춘에게 안부를 묻다>에서는 재학생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었습니다. 재학생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싶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사회복지학과 학생들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어요. 그러다 보니 문장도 마음도 형식적이었고 며칠 지나니까 힘이 떨어졌어요. 그러다 한 사람 앞에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마음도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어느 한 사람에게 편지를 쓰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야 해요. 그 생각은 곧 그 사람에 대한 간절한 기도가 되어 그것이 편지로 나타나요. 꼭 편지를 받는 한 사람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이가 처한 사회 상황, 그걸 보는 나 자신까지 생각해야 해요. 편지가 단순히 나와 누군가의 소통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의 대결인 면도 있으니까요. 그런 편지를 우리 과 학생들에게 1년 3개월 동안 매일 아침에 썼어요. 하루도 빠짐 없이요. 그 시간이 저에겐 하루의 가장 정화된 시간이었어요.

-함석헌 선생과의 만남도 편지로부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한일회담 반대 운동이 신문에 나왔어요. 함석헌 선생이 단식을 했었는데 신문에서 선생님 주소를 보고 단식을 응원하는 편지를 보냈어요. 단식 격려 고맙다는 답장이 왔어요. 이 외교는 잘못된 것이니 주변 사람에게 알려달라며 간단하게 쓴 편지였어요.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선생님께 편지를 받았다는 것에 감동했죠. 제가 또다시 편지하니까 선생님이 또 답장하셨고, 3년쯤 후에 대학교 축제 공개 강연에 제가 편지로 함석헌 선생을 초청했어요. 그때 처음 만나게 된 거죠. 그 이후에는 1년에 몇 번 선생님 댁 방문도 하고 인사도 드리고 했어요. 제가 독일 유학 했을 때도 편지를 주고받았고요, 선생님이 세계 여행할 때 독일에 오시기도 했고요.

-함석헌 선생이 발행했던 <씨알의 소리>의 편집주간이기도 하며, 현재 함석헌 선생 사상과 관련된 강의도 하고 계신데요. 교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분의 생각을 우리는 씨알 사상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씨알은 맨사람, 민중, 껍데기가 없는 알맹이 사람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만 남은 것을 마치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삽니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거룩하고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제도, 전통, 교육에 의해서 덮여 버려요. 자신을 덮은 것을 벗겨 내고 깔끔한 진짜 알맹이의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 알맹이의 사람을 찾으면 사회는 자연스럽게 민주사회가 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됩니다.

국가, 민족, 이데올로기는 엄밀히 따지면 하나의 방편, 일시적 도구일 뿐인데 지금은 마치 그것이 주인처럼 되어 있어요. 씨알 사상은 사람이 근본으로 주인이 되는 거예요.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 짐승에도 그 사상이 확장되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평화 세계를 이루는 게 가장 핵심이에요. 이러한 생각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함석헌이라는 인물보다는 함석헌은 씨알을 이렇게 얘기했다는 걸 전하는 거예요. 함석헌 선생이 그렇게 얘기했지만 다른 사람은 씨알에 관해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거고요. 각자가 자신이 씨알인 것을 깨닫는 게 중요해요. 저도 저의 씨알 관을 함석헌 선생을 통해 이야기하며 다른 이로 하여금 자신이 씨알인 것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공부, 고민을 해온 세상의 일원으로서 보는 세계가 궁금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이나 대전, 혹은 현대인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계시는지요. 현재에 문제를 인식하고 계신다면, 그것을 타개할 방법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진보와 보수가 있듯이 앞으로 나가려는 강력한 힘이 있는가 하면 그걸 막으려는 힘이 있잖아요. 글로벌화의 한편에는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강해요. 글로벌을 한편으로 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제재하는 거죠. 시간이 지나면 소소한 지역중심주의 같은 것들은 깨지지 않을까 싶어요. 삶의 양상은 가족에서 씨족으로 부족으로 민족으로 확장됐죠. 씨알도 마찬가지예요. 대한민국 씨알만이 씨알이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은 씨알이에요. 깨어있는 씨알들의 공동체가 형성되면 세계가 지금과 같은 다툼과 갈등 없이 화해할 가능성이 생겨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굉장한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 사람들이 스스로를 깨우고 주변을 깨우고 연대하는 운동이 있어야 해요. 깨어있는 선의 세력들이 연대감을 갖는 게 중요해요. 강의하고, 잡지 만들고, 책 만들고, 함께 책 읽고 하는 게 다 그런 것 아닐까요? ‘시루’와 같은 작은 모임들이 들불처럼 여기저기 일어날 때 그건 시대가 그렇다는 걸 얘기하는 거예요. 요사이 대학에서는 인문이 죽어가지만, 사회 전반에서 독서운동, 인문운동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런 것들이 형식주의를 떠나서 실질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시대가 증명하는 거예요. 이것이 나중에는 강력한 흐름이 되지요. 아무리 꽃샘추위가 온다고 해도 봄은 못 막는 것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옹달샘터의 작은 독서 모임도 다른 이들에게 ‘나도 해봐야겠다.’ 하고 생각하는 꿈틀거림을 주면 좋겠어요.

-이 시대에 철학, 생각하기가 어떤 점에서 필요한지 궁금합니다. 생각하는 힘이 삶에 주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생각하고 철학하는 것은 자기를 찾는 거예요. 자기 정체성을 찾고 도대체 나는 무엇인지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무엇이며 이 시대에 서 있는 나는 무엇인가를 정립하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나는 아무것과 관계없는 나가 아니라 이웃과 관계하는 나예요. 생각하고 자기 철학을 정립하는 과정이 없으면 힘이 빠져서 맥없이 살겠죠. 생각하는 것이 우리 내면 가장 깊은 원동력이라고 봐요. 자신을 넘어지지 않게 해주는 역할이죠.

-해주신 말씀을 정리해 보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삶의 주체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이와 나누는 것이 삶의 주체로 사는 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지키며, 다른 이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네요.

혼자 생각하면서 동시에 나누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 만나고 책 쓰고 잡지 쓰고 하는 게 나눔이잖아요. 그 나눔 속에서 풍성한 삶이 나옵니다. 나눔은 공동체 행사의 가장 핵심이에요. 원래 나눔이란 건 자기가 지은 농산물을 같이 먹는 거예요.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잖아요. 내가 화라는 농사를 졌으면 누구는 행복이라는 농사를 짓는 거죠. 화난 사람이 화가 났다고 얘기하면 듣는 사람은 왜 그리 화를 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화라는 농사를 지은 사람에게서 화가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 화는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게 아니라 정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눔입니다. 나눔은 공동체 행사의 가장 핵심입니다.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힘들었니. 넌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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