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_부림교복쎈타 '교복마춤'
기록_부림교복쎈타 '교복마춤'
  • 글 사진 송주홍
  • 승인 2014.04.2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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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들어갈 때니 15년도 지난 일이다. 입학식 앞두고 엄마가 교복 사러 가자며 시장 맞춤교복집으로 데려갔다. 아이O니, 김설O이니, 엘리O니 하는 교복 브랜드가 막 생길 때였다. 어린마음에 억지를 부려 결국 김설O학생복에서 교복을 샀다. 시장의 맞춤교복집보다는 꽤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별의별 교복 브랜드가 생겨났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는 선택의 여지없이 브랜드 교복을 사야 했다. 시장에도, 학교 앞 어디에도 맞춤교복집은 없었다.
2월 어느 날, 계룡공고 앞을 지나는 길이었다. 우연히 '교복마춤'이라는 글자를 봤다. '부림교복쎈타'라는 간판도. '아직도 맞춤교복집이 있네.'라는 생각에 반가움이 앞섰다. 그 시절 추억도 잠시 스쳤다. 들어가 볼까 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입학 준비로 한창 바쁘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다. 날이 풀리고, 3월 어느 날 부림교복쎈타를 다시 찾았다.

'드르륵'하는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10평이나 될까. 밖에서 봤던 것과 달리 내부는 생각보다 작았다. 왼쪽과 오른쪽, 정면 벽면에는 교복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사장님은 느긋느긋 교복 바지를 수선하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기술 하나면 먹고 살던 시절
봉윤균(66) 사장님이 재단 일을 시작한 건 50년 전이다. 지금으로 하면 추동이고, 그 당시로 하면 대덕군 동면 용계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1년 있다가 소제동으로 이사 왔으니, 15살 무렵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 누구나 그렇듯 초등학교만 나와도 감지덕지였다.

"지금은 없어졌는데 여기서 조금만 가면 동중학교라고 있었어요. 그 앞에 동일양복점이라는 곳이 있었거든. 아는 사람이 소개해줘서 15살 무렵부터 거기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거죠."
공부보다는 '기술'이 중하던 시절이었다. 기술 하나만 배워도 먹고 사는데 지장 없다고 말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저 기술이나 배우길 바라는 마음으로 부모들은 "돈은 필요 없으니까 기술이나 잘 가르쳐주세요."하며 자식을 맡겼다.

"그런 시절이었어요. 나도 그런 식으로 들어간 거고. 한 마디로 시다지. 뒷모도라고도 하고. 그냥 재단사나 미싱사가 시키는 잔심부름하면서 어깨 너머로 기술 배웠던 거죠. 실제로 처음 몇 달은 월급도 안 받고 일했죠."

그 시절 동일양복점에는 고만고만한 또래 아이들이 늘 대여섯 명씩 있었다. 봉윤균 사장님처럼 기술이나 배울 요량으로 머물던 아이들이었다. 버티지 못해 나가는 아이들도 있고, 봉윤균 사장님처럼 열심히 하면 뭐라도 하나 더 배울 수 있었다. 봉윤균 사장님은 동일양복점에서 4년이나 우직하게 기술을 배웠다.

"아침 8시까지 출근해서 저녁 8시 넘어서 들어왔으니까. 그 당시에는 고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 추억 같아요. 그건 생각나네. 천변길로 소제동 집을 왔다 갔다 했었다고. 그때가 1960년대 초반이니까요. 가로등이 있어 뭐가 있어. 퇴근하고 집으로 올 때면 깜깜한 거죠. 그때는 어린 나이니까 무서워서 늘 빨리 걸어왔던 기억이 나네. 그렇게 동일양복점에 다니다가 지금으로 하자면 스카웃된 거지."

그 당시 대전극장통으로 복장사가 쭉 있었다. 맞춤 옷 가게를 그 당시에는 복장사라고 불렀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지만, 신신복장사, 현대복장사, 대우복장사가 모두 대전극장통에 있던 복장사였다. 봉윤균 사장님은 동일양복점에서 신신복장사로 일터를 옮겼다. '시다'에서 미싱사로 채용된 것이다. 그때부터는 일한 만큼 돈을 벌었다.

"그때는 공군잠바랑 재건복 같은 게 유행이었어요. 공군잠바 하나 만들면 얼마, 바지 하나에 얼마, 그런 식으로 내가 만든 만큼 돈을 받은 거죠. 일하는 건 어딜 가나 다 똑같아요. 기술이 있으니까 미싱사들은 보수에 따라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거예요."

봉윤균 사장님도 그렇게 대전에 있는 복장사 여기저기를 옮겨 다녔다. 마지막으로 남 밑에서 일한 건 현대복장사다. 그때는 재단사로 들어갔다. 자격증이나 정확한 체계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관례적으로 '시다' 다음이 미싱사였고, 미상사로 얼마간 경력을 쌓으면 재단사가 될 수 있었다. 현대복장사에서 또 몇 년을 지냈다. 그러다가 주인 사정으로 가게가 정리되면서 처음으로 가게를 냈다. 이름은 토성복장사였다.

"저기 중동에 한밭식당 알지요? 그 뒤편에다가 처음으로 내 가게를 낸 거지. 저기 미싱기랑 오바로크 기계도 다 그때 산 거예요. 그때 비싸게 주고 샀지. 그러니까 여태 쓰지. 저 기계 둘 다 30년은 됐겠네."

결혼하고도 한참 토성복장사를 운영했다. 그때만 해도 결혼한다고 하면 복장사나 양복점에서 신사복을 맞춰 입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옷이 복장사를 거쳐 나왔기 때문에 장사가 그럭저럭 됐다. 그러다가 건물주가 가게세를 올리면서 타산이 맞지 않아 토성복장사 문을 닫아버렸다.

갑순이도 팔고 갑돌이도 팔아야 하는데
"집이 바로 여기였으니까요. 오며가며 이 가게가 비어있는 걸 봐뒀었지. 그때만 해도 교복이라는 게 검은색에다가 차이나 카라로 다 똑같아가지고 복장사에서 교복도 만들었거든요. 기본적으로 교복도 만들 줄 알고, 집도 가깝고, 학교도 바로 앞에 있고 하니까 고민하다가 토성복장사 문 닫고 여기다가 맞춤교복집을 차린 거죠."

그렇게 부림교복쎈타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가게를 낸 것이 1987년 8월이다. 인생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낸 것이다. 1987년,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교복자율화 정책을 시행하던 때였다. 교복자율화를 시행하기 전까지는 복장사에서 교복도 만들었기 때문에 교복집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계룡공고 앞에서도 부림교복쎈타가 첫 번째 교복맞춤집이었다. 이름은 교복쎈타였지만, 처음에는 계룡공고 학생들 실습복이나 교련복 등을 만들어 팔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바로 정책이 바뀌며 계룡공고 학생들도 교복을 입게 됐다.

"교복 생기고는 좀 괜찮았어요. 그때는 계룡중학교도 있었으니까. 중학교, 고등학교 합치면 학생 수가 굉장했어요. 타 지역에서도 계룡중․고등학교로 다녀가지고. 한창 때는 입학시즌에 100벌도 넘게 팔았었어요."
큰돈은 못 벌어도 먹고는 살았다. 슬하에 둔 2남 1녀도 탈 없이 키웠다. 장사가 안 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으로 넘어오면서다. 브랜드 교복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학생 수가 줄면서 계룡중학교도 폐교 했다. 부림교복쎈타보다 늦게 생겼던 맞춤교복집이 하나둘 없어진 것도 그 무렵이다.

"가격은 당연히 메이커가 비싸지요. 근데 가격 문제가 아니에요. 요즘은 자녀가 많지 않잖아요. 부모들 입장에서 메이커가 아무리 비싸더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걸 사주는 거예요. 학생들 표현으로 하자면 여기는 비메이커인데, 그런 걸 누가 입겠어요. 어쩔 수 없는 거죠 뭐."

서너 곳 있던 맞춤교복집이 전부 문을 닫고 지금은 부림교복쎈타만 계룡공고 앞을 지킨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50~60벌 가량 팔았었다. 올해는 그마저도 못 팔았다. 계룡공고에서 교복을 공동구매 해버린 것이다. 농사처럼 입학시즌에 바싹 팔고 그 수익으로 1년을 사는 건데, 봉윤균 사장님은 올해 겨우 14벌 팔았다.

"5월 쯤 하복 팔고 나면 그때부터 동복을 준비해요. 마이 같은 건 하루에 하나, 와이셔츠나 바지 같은 건 하루에 두어 벌 정도. 아침에 나와서 퇴근할 때까지 놀면서 하나씩 만드는 거예요. 올해는 제가 여분까지 80벌을 준비했어요. 근데 보세요. 저게 다 못 팔아서 그대로 남은 거예요."

봉윤균 사장님은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시장 원리대로 갑순이도 팔고 갑돌이도 팔아야 하는 건데, 공동구매라는 것이 갑순이는 일감 몰아줘서 배 터져 죽게 하고, 갑돌이는 굶어 죽게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고민 중이에요. 실은 작년에도 적자였거든요. 이제 얘들도 다 키웠고, 결혼 시켰으니까 돈 욕심도 없어요. 저거 남은 교복이나 학교에 기증하고 그만 할까 생각 중이에요."

봉윤균 사장님은 다시 말 없이 교복 바지 수선에 집중했다. 한참을 그랬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뗐다.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

"학생이 교복 수선을 맡겼는데 옷에서 담배 냄새가 확 나더라고. 수선한 다음에 '담배는 백해무익하고 건강 해치니까 끊으세요.'라고 종이쪽지에 적어서 주머니에 넣어줬어요. 일주일 있다가 학생들 다섯 명이 몰려와서 아저씨가 주머니에 쪽지 넣어놨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속으로 괜한 짓을 했나 하면서도 내가 써서 넣었다고 했죠. 그랬더니 아저씨 쪽지보고 다 같이 담배 끊기로 했다고, 감사하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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