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삽교천과 학창시절 농촌의 추억
(에세이) 삽교천과 학창시절 농촌의 추억
  • 충청뉴스
  • 승인 2025.06.2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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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유규상

내가 태어난 곳은 아산에서 삽교천을 끼고 있는 선장면 시골 마을이다. 마을을 반달처럼 크게 둘러싸고 있는 삽교천은 1979년도에 제방을 막기전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해변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바닷가에서 사는 몸통과 다리가 빨간색인 황발이(바다 게의 일종)를 수시로 잡아서 산골에 살고 있는 친한 친구들에게 선물로 제공할 수 있는 지역 특산물의 산지이기도 했지만 바닷물의 흐름에 따라 해변가 농지의 경계를 수시로 변형시켜 봄철만 되면 떨어져 나간 농지를 보충하기 위하여 농민들이 간척사업에 동원되어야 하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지금은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담수호로 조성되어 당진과 아산지역의 농촌에 물을 공급하는 젖줄이 되었지만 그때는 농민들에게 긍정적인 것들만 제공해 주지는 않는 곳이었다.

이러한 삽교천의 자연환경은 필연적으로 넓은 평야지대를 만들어 주었고, 바닷가 안쪽에는 소규모의 포강(소류지)들이 민물을 머금고 있어서 벼농사를 짓는데 최적의 입지가 형성되었다. 부모님도 이 지역에서 할아버지의 가업을 승계하여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토착 농부이시다. 시골에서 농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선택의 여지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진 숙명으로 생각되지만 당시로서는 농업이 국가기반의 중심산업이기 때문에 자부심을 가진 직업이기도 하였다.

농부의 일상은 단순했다. 그러나 힘이 드는 노동의 현장이다. 농사철이 되면 어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나머지 짜투리 시간은 밭에 심은 감자나 옥수수, 호박 등을 가꾸는데 열중 하였다. 아버지는 농사일에 종사하시면서 마을 이장도 오랫동안 맡아 오셨다. 당시 마을의 현안과제는 2가지인데 하나는 천수답을 수리안전답으로 전환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을에 전기를 끌어오는 것이었다. 특히, 마을에 경지정리가 되기 이전에는 비가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천수답이 대부분이라서 장마철이 오기전 가뭄이 심해지면 마을 주변에 있는 큰 포강에서 발동기 동력을 이용해 물을 공급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때 벼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농부들은 경쟁적으로 물길을 확보하는 전쟁을 벌였다. 때로는 물고 싸움도 일어났고 몇 일 밤을 지새면서 물이 제대로 논에 들어가는 지 지켜 보아야 하는 고단함이 동반되었다. 이후 추진된 경지정리 사업으로 장마철에 예당 저수지 홍수조절을 위해 방류되는 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쌓은 큰 높이의 제방도 헐고 구불구불한 신작로를 직선도로로 포장하여 살기 좋은 농촌마을로 변모되었다. 상전벽해가 된 것이다.

이어 마을에 전기를 끌어오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 이유는 4개의 자연부락이 분산되어 전력을 공급하려면 많은 전신주를 설치해야 하는데 이때 들어가는 비용을 염려하여 사업자들이 참여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지역민들과 자주 회의를 가졌고 기관장들을 설득하여 사업추진을 성공적으로 이끄셨다. 드디어 전기가 들어와 마을 전체가 밝아지던 날 동생들과 같이 책을 펴고 공부하던 그때가 지금도 눈에 아른 거린다. 어제까지도 야간에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려면 석유를 사다가 전등불을 밝혀야 하는 불편이 없어졌고 그을음으로 인해 콧구멍이 시커멓게 되는 경우도 사라졌다. 시각장애인이 새로운 눈을 얻은 것처럼 우리에게 찾아 온 광명의 세계는 참으로 신기하고 감동적인 일이었다.

마을의 숙원사업 해결로 농촌생활의 삶이 나아지는 환경속에서도 어머니는 밭에 나가 계절별로 심어야 할 채소와 콩 등의 생육상태를 수시 점검하는 일과 집에서 키우는 돼지와 소 등의 가축에게 먹이를 주고 청소를 하는 역할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집에서 토끼를 키웠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 돌아 오면 토끼에게 줄 들풀을 뜯으러 들판을 나가야 했다. 그리고 주말이나 방학때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삽교천 주변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새우를 잡는 시간이 많았고, 때로는 새원장 마을근처에 있는 큰 포강의 갈대밭에서 때까치가 낳은 알을 찾으러 다니거나 낚시질을 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특히, 학교에서 돌아와서 포강에서 자주 낚시질을 하는 나를 지칭하여 어른들은 ‘소년 강태공’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농촌의 일상은 단조롭지만 일정한 순환주기로 돌아간다. 봄이 되면 농촌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볍씨를 파종하고 모내기를 하면서 1년 농사의 대장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트랙터와 같은 현대화된 기계의 도움을 받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농번기가 본격 시작되면 우리집 3형제들도 총동원 되었다. 형제들은 농사철이 되면 삽을 들고 소가 갈아 놓은 논에 들어가 평탄작업을 하거나 심부름을 하며 아버지를 도왔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농사일을 하는 인부들에게 밥을 지어 나르거나 반찬을 만드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아들들에 대해서 어머니는 “사내놈들은 써 먹을 데가 별로 없어” 하는 불만을 토로하면서 딸을 가진 가정을 부러워 했다.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다. 그중에는 여름에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는 벼 도열병과 벼멸구 그리고 문고병으로 인한 농작물 수확량 감소를 예방하기 위하여 분무기로 농약살포를 하는 일이 많았다. 가뭄과 장마철이 되면 태풍이나 수해피해가 없도록 항상 노심초사하면서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였으나 일기예보는 맞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농민들의 고생은 결국 가을의 추수로 보상을 받지만 쌀이 부족한 당시로서는 신품종 통일벼의 재배로 수확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반면에 낱알이 땅에 쉽게 떨어지는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우수품종 개량을 염원하였다.

가을의 농촌은 가족단위 혹은 집단으로 추수에 동원되었고 필요하면 이웃들과 품앗이로 벼를 수확하였다. 탈곡은 논의 규모와 이동거리를 감안하여 논에서 직접 하거나 집안 마당에서 볏단을 날라 타작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완료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분주한 시기였다. 볏짚은 탈곡이후에 들판에 깔아 놓고 말려서 짚단을 쌓거나 아니면 집에서 땔감으로 쓰기 위해 지게로 볏단을 얹어 날랐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텅 빈 공간으로 황량함을 더했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농촌은 잠시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무렵에는 집에서 시루떡을 하였다. 밥을 해 먹는 솥단지 위에 시루를 얹은 다음 팥고물과 찹쌀을 번갈아 겹겹이 쌓고 쩌서 만든 떡이 완성되면 방으로 가져와 한 해의 범사에 감사의 절을 올렸다. 그리고 나서 안방, 건너방, 부엌, 장독대, 화장실, 굴뚝, 지붕 등 집안 곳곳에 떡을 가져다 놓았다. 이웃집에도 떡을 돌렸다. 어쩌면 시루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내는 것은 1년 농사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다.

텅빈 들반에 부는 겨울 바람은 진짜 춥고 매섭다.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3km 넘는 등굣길은 큰 길(신작로)을 따라 가기도 하지만 대개는 시간절약을 위해 논을 가로질러 직선으로 학교까지 달려 가는 것이 통례였다. 하지만 텅빈 논바닥에는 물이 채워져 있거나 습기를 머금은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땅은 상당히 질퍽거렸다. 하여 신발에는 늘 논 흙이 붙어 있어서 깔끔한 복장상태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학교에 가는 아침에는 바람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어서 몸을 뒤에서 밀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학교에서 집에 가는 오후에는 바람을 앞에서 안고 가는 상황이라 맞바람으로 인하여 이동하는데 상당히 지장을 초래하였다. 추위를 가급적 피하기 위해 머리를 박고 바람의 저항을 최대한 피하면서 낮은 자세로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같이 달리던 친구들과 부딪쳐 넘어지는 경우가 허다 하였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늘 죽으라는 법은 없다. 이때 쌓은 달리기 실력은 국민학교 운동회를 할때마다 마을별 달리기 경기에서 우리 마을이 우승하게 되었음은 참으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겨울방학을 학수 고대하였지만 막상 방학이 되면 딱지치기, 구술놀이, 축구시합하는 정도로 시간을 보냈다. 방학이 끝나면 설명절이 돌아오고 봄이 온다. 봄이 오기 시작하는 절기는 입춘이다.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이고 친구들과 어울려 앞 동네 신덕리에 놀러 가면 그 마을에 사는 친구의 집 대문에 부착된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고 쓴 글귀를 매년 만난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그런 글귀를 대문에 걸어 놓은 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글의 의미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쓴 친구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친구의 아버지는 늘 무뚝뚝한 분이셨고 큰 벼슬을 지낸 분도 아니신데 저렇게 유식한 한자를 사용하실 줄 안단 말인가 !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친화력이 있고 성격이 명랑하지만,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학동이었다. 학창시절 학업은 장차 사회에 나가서 편리한 지식을 습득하는 중요한 과정이지만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은 이후 시간이 흘러 내가 군대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 친구에게서 받아 본 위문편지를 통해서였다. 친구의 글은 훌륭한 명필이였고 멋진 문장이었다. 그 친구 역시 아버지의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입춘대길 건양다경」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이제 나는 평생 종사하던 직업의 일선에서 물러나 다시 고향에서 살고 있다. 부모님은 지금도 농업에 종사하신다. 그리고 언제나 고향의 일상은 평온하고 익숙한 하루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이곳 삽교천이 둘러싼 선장면 남부 지역의 농촌환경은 나에게 있어 끈기와 인내심 그리고 심신의 배포를 심어준 자양분이 되었고 심성이 착한 친구들과 어울려 학창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는 추억의 보물장고 이다. 그리고 세상을 살면서 나 자신의 정체성이 흐려질 때면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돌아가 다시 나를 찾는 공간이 되었음을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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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혀윤 2025-06-24 16:14:34
좋은글이네요
시골의 고즈넉한 풍경이
연상이되어 미소가 지어지네요
좋은곳에서
좋은일만 생기시길